제20회 전국청소년논술토론한마당

논술토론한마당소개

청소년, 시민저항권을 말하다. 제20회 전국청소년 논술토론한마당
20회 주제제안문

20회 한마당 주제선정에 대한 안내문입니다.

주제제안문


‘복종’을 떨치고, ‘저항’을 노래한다.



저항은 영어로 resistance라 한다. resist를 어원으로 한다. re는 다시(again), 뒤로(back), sist는 서다, 버티다(stand)의 뜻이다. 곧, 저항한다는 말은 뒤로(반대로) 버티고 서거나, 다시 제 자리에 선다는 말이다. 그러면 제 자리는 어디일까? 우리는 제 자리를 잘 알지도 못하고, 평소에 제 자리를 인식하지 않고 무의식 속에 움직이고,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스스로 올곧게 자리 잡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역사 진행의 결과 ‘지배-피지배’의 관계라면, 더 나아가 ‘피지배’라는 생각과 느낌도 없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노예인가?
복종은 우리 살갗처럼 자연스럽다. 우리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아니 떼어낼 수가 없다. 인류가 역사를 지은 이후로 복종은 인류 문화의 근본을 이룬다. 억압과 지배받는 의식이 자연스러워, 도리어 본체를 지시하는 ‘복종’이라는 단어가 낯설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생각대로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했다. 각자 말만 하고 아무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시 말하기 위해 ‘공동체’를 만들고 말할 순서를 정하기 위해 ‘대표자’를 뽑았다
. 그러나 ‘공동체’의 평온과 화목을 위해 구성원의 권력과 이익을 모아 ‘대표자’의 손에 쥐어 줬던 결과, ‘대표자’는 곧 ‘권력자’가 되었다. 그 후 ‘권력자’가 한 최초의 행위는 구성원의 입을 막고, 눈을 가리는 일이었다.
그 뒤 그들은 ‘고개를 들라’는 ‘하명(下命)’으로 잠시의 시선을 허락했고, ‘말을 하라’는 ‘명령(命令)’으로 잠깐 동안 ‘권력자’ 스스로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 그러다 거슬리는 말 한마디에 ‘구성원’들은 목숨을 잃는다.
시간이 지나 ‘권력자’는 ‘왕’이 되고, ‘귀족’이 되고, ‘양반’이 되고, ‘주인’, ‘사장’, ‘자본가’, ‘공권력’이 되었다. 역시 ‘구성원’은 ‘신하’가 되고, ‘평민’이 되고, ‘상놈’이 되고, ‘종과 노예’가 되고, ‘직원’, ‘노동자’, ‘시민’이 되었다.

우리는 사회와 학교, 가정, 갖가지 모임에서 ‘인류 진화’의 영웅담과 찬가를 배우며 성장한다. 수 만년을 자연 재해와 여러 동물의 위협 속에서 인류는 살아왔고 존재했다. 그러나 ‘인류 진화’가 모든 인류에게 생존과 축복을 준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공동체’는 ‘도구’를 비롯한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소유 정도에 따라 인간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이원화했다.

이 계급 이원화의 핵심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위임으로 권력을 만들어, 피지배계급을 복종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두 계급관계의 형성 후에 인류역사는 이 두 계급의 지배와 갈등, 저항의 역사를 반복했다.
이천 년 전 먼 이국 땅 거대 로마제국에 ‘구경꾼의 노리개가 되느니, 싸워서 자유를 되찾자’고 맞섰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는 6,000여 명의 저항군과 함께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했고, 천 년 전 이 땅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느냐?’고 다른 종들을 모아 거사를 도모했던 무신정권의 지배자 최충헌의 노비 ‘만적’은 포대에 싸여 예성강 푸른 강물 아래 산채로 던져져, 저항의 역사로 전해온다. 이 두 저항의 역사에 오롯이 새겨진 두 사건은 오늘까지 저항의 역사가,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전해준다.

‘스파르타쿠스’와 ‘만적’이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임을 깨달은 것은 누구의 도움도 아닌 ‘자각’이다. 자각 후에 그들이 한 최초의 행위는 ‘말’이다. 자기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피지배계급’이 지배를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려면 스스로 깨달은 후에, 지배자에게 빼앗긴 ‘억눌린 자(Oppressed)’의 ‘시선’과 ‘말’을 되찾아야 한다.
현대에서 99%의 사람들은 ‘정치, 경제, 노동, 사회문화, 가정, 교육’, 심지어 ‘환경’부문조차 여전히 억압과 차별을 받고 있다.
지금도 대다수의 사회에서는 정치(가)는 ‘시장(자본)’을 대변하는 충실한 전문가 역할로 진실한 이익 집단인 대중(Demos, People)을 억누르고, 경제는 노사구조의 안정감과 견고함보다는 유연화를 가장한 ‘해고’를 상시화하고, 노동구조의 ‘정규직’과 ‘비정규직’화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더 나아가 사회와 문화에서 정상(normal), 표준(standard)이란 허울로 소수의 개성과 개인의 자유에 대해 순종과 복종을 요구하고, 여전히 삶의 유일한 안락처인 가정에서도 세상의 절반인 동행자의 존재는 아랑곳없이 ‘가부장제’의 존속을 요구한다. 심지어 평등하다는 자연 환경마저 철저한 ‘빈익빈 부익부’의 구조로 가고 있다.

철학자 부르디외는 이 모든 지배-피지배 구조의 성향을 내재화하는 ‘아비투스(habitus)’와 ‘구별짓기’로 대표하는, 사회문화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근거지로 ‘학교’를 지목한다.
평등과 자유의 총합체를 구가하는 민주사회의 실상은 숨겨진 ‘억압’과 ‘차별’의 은폐물이다.
진정한 평등과 자유의 세상은 더 이상 ‘억눌린 자(Oppressed)’가 실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다. 떳떳하게 ‘얼굴’을 들고, 당당한 ‘눈빛’으로, 잔잔하지만 힘찬 소리로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억눌린 자(Oppressed)’가 입을 닫고, 눈을 감는다면, 그 지점이 인류가 대재앙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21세기 대재앙 후쿠시마 원전의 원인을 두고, 많은 경우 원자력의 기술 부문을 지적하지만, 사고 조사위원회 위원장인 구로카와 키요사는 “감독관청의 입장과 운영사인 도쿄전력의 입장이 같았기 때문이다.”라며, “권위와 직권에 대한 무비판적인 복종”을 사고 발생 원인으로 꼽았다.
저항은 두렵고, 늘 낯설다. 그리고 무척 힘들다. 그러나 절대 왕조 ‘루이 16세’의 압제에 대한 시민의 각성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고 프랑스 혁명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프랑스 인권선언>을 낳았다.
<프랑스 인권선언>의 제 1조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태어나서 살아간다. 사회의 차별은 오로지 공공 이익에 근거할 경우에만 허용한다.”고 뚜렷하게 적고 있다. 역사 발전의 결과로 얻은 인류사회의 일반 원칙들, 즉 신뢰의 원칙, 약자배려의 원칙, 평등의 원칙, 공공성의 원칙은 절대자의 시혜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복종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에서 비롯한 희생과 저항이 가져다준 위대한 교훈이자 선물이다.
저항의 진통을 거쳐야 우리는 평등이란 자유를 얻는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230년이 지났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는 평등하고 자유로운가?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주인이 종을 깔보자/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바로 그 낫으로”라고 <종과 주인>을 노래했던, 시인은 조용하고, 나직하게 그러나 힘차게 우리에게 <노래>를 들려준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김남주,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