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제
한마당 주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세분화된 주제와 쟁점입니다
바틀비의 다른 이름들에 관하여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공진호 옮김, 문학동네, 2011.
만남은 새로운 풍경과 마주하는 여행에 곧잘 비유됩니다. 어떤 이와의 만남은 포구에 정박한 잿빛 어선의 풍경처럼 허량한가하면, 누군가는 놀이공원의 풍경처럼 쉼 없이 반짝이기도 하지요. 또 총총히 빛나는 도시의 불빛 같은 풍경을 지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심지 외곽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도로처럼 적막한 풍경을 지닌 이도 있습니다. 한 권의 소설을 읽는 것 역시 훌쩍 떠나는 여행과 같다면, 그 여행은 새로운 인물과의 만남이 틀림없습니다. 여기, 그 어떤 만남보다 독특한 풍경을 지닌 자가 있습니다. 그는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입니다.
허먼 멜빌은 『모비딕(1851)』의 작가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 압도적이면서도 정교한, 혁명적이고도 섬세한 서사시의 작가는 포경선에 내려 우리를 당시(1853년) 미국 금융경제의 중심지 월 스트리트로 데려갑니다.
화자는 창밖을 내다보아도 온통 회색 벽뿐인 그곳에서 삼십 년간 원만하게 일해 온, 나름 성공한 변호사입니다. 딴에는 자부심 그득한 그의 세월에 단연코 기이한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틀비, 그의 직업은 필경사scrivener입니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 그런데 바틀비가 그의 은둔처에서 나오지 않고 매우 상냥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아니 당황했을지 한번 상상해보라. - pp. 28-29. |
훤히, 일상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지요. 바틀비가 택한 “안 하는 편”은 도구화된 몰개성의 개인성을 일깨웁니다. 이후로도 그는 필사본 검증뿐 아니라 사소한 심부름도, 행위에 대한 해명의 요구에도 같은 답을 돌려줍니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소설을 이끌어갈 변호사(타협적인 화자)는 바틀비(비타협적인 주인공)을 절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작품을 읽어내는 우리 역시 이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인 바틀비의 서정을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가 소설 속에서 무려 열여덟 차례나 반복해서 되뇌는 말을 단서로 어렴풋이 유추해볼 뿐입니다.
나는 충격 받은 감각기관들을 추스르며 잠시 완벽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곧 내가 뭘 잘못 들었거나, 바틀비가 내 말뜻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어조로 요구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만큼 분명한 어조로 그 전과 같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pp. 29-30. |
“나는 그렇게 안 하는 것을 택하겠습니다(=안 하고 싶다, I would prefer not to).”와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을 택하고 싶지 않습니다(=하고 싶지 않다, I would not prefer to).”는 분명, 미묘하게 다릅니다. 바틀비는 일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 안 하는 것을 긍정한 것입니다.
종래의 소설 주인공들이 욕망을 위해 투신하거나 숱한 방해물과 대척점에 선 인물과 결투를 벌인다면, 바틀비는 그러한 주인공과는 다른 행보를 택함으로 그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사고의 원류를 독자가 파악하게끔 합니다.
화자는 바틀비에게 일을 계속할지 아니면 떠날 것인지를 묻습니다. ‘이것’과 ‘저것’이라는 선택의 자유를 주는 듯하지만, 이는 실상 일을 주는 자의 권력에 의해 강요된 프레임입니다. 이 ‘…이거나 …이거나(either/or)’의 선택지 앞에 바틀비는 선호의 논리를 발명해냅니다.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는 것을 택하겠습니다”라고요.
요령부득인 그를 대하는 화자는 제3의 선택지를 발견하지 못한 채 해고를 통보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틀비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며 자기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죠. 화자는 오히려 도망치듯 사무실을 옮겨버립니다.
아!
그럼에도 바틀비는 그 건물을 떠나지 않습니다. 변호사의 다음 세입자 역시, 이 당혹스러운 존재를 어쩌지 못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바틀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공권력의 의해 월 스트리트로부터 격리돼 식음마저 거부하며 교도소 벽을 마주한 채 죽음을 맞습니다.
법률문서 필사원筆寫員 혹은 필경사筆耕士란 직업은 바틀비란 이름을 제하고는 생전의 그를 설명할 유일한 사회적 명명입니다. 현대적 O.A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았던 당시에 필사를 하고 그 분량만큼 돈을 받았던 직업인 필경사는 그리 머지않은 훗날, 그 자리를 기계에 내주게 되지요. 이 문제적 인물이 등장한 19세기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 등 광범위한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변화는 숙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바틀비라는 문제적 개인의 저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기근대사회라는 시대인식이 필요하죠. 재밌는 것은 이러한 인식이 작품이 쓰인 당대가 아니라 현대로 치환해 인색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자본은 정교하면서도 조직적으로 개인을 억압하고, 이를 사회적 문제가 아닌 개인적 차원으로 한정합니다. 그럼으로 주체는 더욱 파편화되고 객체화된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데, 이러한 인간 실존의 위협 속에 노출된 개인의 한 전형이 바로 바틀비가 아닐까요. 그는 사회적 가치가 곧 자기 판단의 기준인 화자와 대비되는 인물로, 개인적 독립성의 표상입니다. 세상과 대화하지 않으며, 사회로부터 소외와 배제가 의미하는 공포에 조종당하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끝내 지고의 가치인 자유를 얻지만, 그 대신 목숨을 포기합니다.
들뢰즈, 아감벤, 지젝, 네그리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바틀비의 “I would prefer not to”라는 포현을 실마리로 후기근대사회에 대한 담론을 길어 올리고 있습니다. 바틀비의 이해할 수 없는 거부 행위가 우리 시대의 삶과 생명이 처한 그 첨예한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라는 점을 긍정할 때, 우리는 그가 백육십 여 년 전 박제된 문학작품 속 인물이 아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안마당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일반 수감자들에게는 접근 금지 구역이었다. 굉장한 두께로 둘러친 벽은 밖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차단했다. 그 석조 건물의 이집트적인 특징이 음울하게 나를 내리눌렀다. 그러나 발아래에는 푹신한, 감금된 잔디가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한 피라미드의 심장인 듯했다. 새들이 떨어뜨린 잔디 씨가 알 수 없는 마법에 의해 갈라진 틈새로 돋아난 것이다. 몸은 이상하게 벽 밑에 웅크리고 무릎은 끌어안고 모로 누워 차가운 돌에 머리를 대고 있는 쇠약한 바틀비가 보였다. 그러나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나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몸을 굽혀보니 그는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깊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 - pp. 89-90, 93. |
바틀비. 그의 항거는 절망적 인간조건에 대한 것이자,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의 비합리성이었을 겁입니다. ‘지구촌’이라는 흔한 말, 약 이십 년도 더 전부터 있어온 허청거리는 시대 규정 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난민들을 구제할 초국가적인 모성의 담론은 왜 없는 것일까요. 이들에게 법과 시민적 권리는 좀체 어디서, 어떤 장면에서 목격할 수가 있을까요. 바틀비는 오늘날까지도 다른 이름으로 살아있습니다. 그가 시간의 마모를 견디다 못해 박제된 인물의 한 전형일 때, 우리의 생은 이전과는 획기적으로 달라져있을 거라 상상해봅니다.
<생각할 지점>
* 우리는 살면서 ‘이것’과 ‘저것’이라는 선택의 자유를 위장한 강요된 프레임을 숱하게 마주한다.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 ‘…이거나 …이거나(either/or)’라는 선택지를 깨고 스스로 선호의 논리를 도출했던 실례를 들고, 자기 삶의 주체성을 자각하여 미래를 견인해나갈 동력은 무엇인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통해 제시하시오.
* 바틀비는 후기근대사회에 등장한 문제적 개인이다. “나는 그렇게 안 하는 것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그의 외침은 단순한 개인성의 발현으로서의 결과물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가 극기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며 어디에 닿고자 하는지, 그의 선택과 행동의 의지가 이천이십 년을 바라보는 이즈음의 한국사회에도 적용가능한가?